고등학교, H의 경우. 前, 남친 이야기.



"미안, 늦었지."

그녀가 내 앞에 앉자마자, '여자'의 향기가 났다. 무겁게 친 단발머리와 붉은 입술, 날카로운 눈매. 장갑을 벗고 머플러를 거둬내고, 목덜미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그녀의 제스처 하나하나에서 여자가 보였다. 
예전의, 해맑은 소년같은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을정도로. 

"오랫만이네, 잘 지냈어?"
그녀의 반짝이는 입술이 달싹였다. 

"그럭저럭. 군대도 다녀왔고, 너는?"
"잘 지냈어."
"유학 다녀왔다며."
"정확히는 아직 유학하는 중이지. 잠깐 들어왔어."
"아...언제 다시 가?"
"조만간에. 일단 음식부터 시키자."

깔끔하게 정돈 된 그녀의 긴 손가락이 메뉴판을 넘겼다. 

그녀와 나는, 5년 쯤 전에 헤어진 연인이었다. 아니, 사실 연인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무색한 고등학교 때의 남자친구 여자친구 사이. 홍대의 어느 노래방에서 첫키스를 한게 유일한 기억일 정도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입시 준비로 헤어진 이후-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페이스북 친구 추천에 뜬 그녀를 추가 한 것이, 이 만남으로 이어졌다.

사실 처음 페이스북에서 그녀를 보았을때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었다. 성형을 해서 얼굴이 달라졌다는게 아니라,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었달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짧은 단발머리에 성격도 왈가닥이라, 정말 가끔 보여주는 수줍은 얼굴을 제외하면 그녀는 정말 소년같았거든.

매사에 진지하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나에 비해, 항상 쾌활한 그 성격에 끌려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SKY를 목표로 했던 나는 하루하루가 재미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어차피 공부 말고는 딱히 잘하는것도 없었고, 잠깐잠깐 보던 애니메이션 외에는 특별한 취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를 만났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친구의 소개였다. 참 밝은 아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이런 재미없는 삶에서 구제해줄지도 모른다고. 원거리 연애였기 때문에 정말 가끔, 가끔밖에 못만났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여러 스트레스에 치인 나는 결국 그녀와 헤어지는 방향을 선택했다. 나도, 그녀도 그날은 참 많이 울었다. 그대로 연락은 끊겼고, 난 SKY는 아니지만, 인서울을 할수 있었다.


세월은 참 무심하게도 지나갔다. 난 1학년을 다니고, 몇번의 소개팅과 한번의 연애를 했으며, 군대를 다녀왔다. 군대에 있을때 너무 심심해서 만든 페이스북이 다시 그녀를 찾아주었고,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5년만에 만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그녀가 한낮의 태양처럼 밝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저녁으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같은, 나른하고 섹시한 느낌. 분명 빛은 빛이나,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쉴새없이 날아드는 메세지에 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남자, 그것도 한두명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듯 했다.  

"만나는 남자는 있고?"
젠장, 내가 왜 이런 질문을. 그녀는 나를 올려다 보며 야릇한 미소를 띄웠다. 

"글쎄."
"하하, 뭐가 글쎄야. 이렇게 예뻐졌는데 남자 하나 없으려구."
"그런가?"
"응. 많이 달라졌어."
"전에는 안예뻤다는 소리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다른- 다른 종류의-"
당황한 나의 반응에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응, 그래. 웃는 모습은 여전하다.

"그렇게 변했나? 손 안댔는데."
"응, 대지마. 지금도 예뻐."
"그냥, 몇명."
"응?"
"만나는건 아니고, 연락오는 사람 정도라면."
그녀는 고루하다는 듯이 눈을 깔았다. 재미없다는 표정.

"그 수많은 남자들중에 나도 들어있겠네?"
"하하하."
"하하.. 왜 웃..."
"미친거 아니야?"
쿵.


"넌 후보에도 없어."

레스토랑 내에 시끄러운 소리가 터널너머에서 들리는것처럼 희미해졌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마치 박제한것 같이, 입술만은 여전히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